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 로셸 (문단 편집) === 위그노의 도시 === 1453년 잉글랜드 최후의 거점이던 보르도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자 백년전쟁도 끝났다. 15세기까지의 라로셸은 프랑스의 대서양 항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고 플랑드르 등의 지역과 포도주와 소금, 치즈 등을 주로 거래하였다. 한편,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은 유럽을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활발했던 지역들 (플랑드르, 스위스 등)에서는 장사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칼뱅의 신교가 퍼지게 되었다. 라 로셸도 그 예외가 아니었고 상업적 특례가 보장된 자치도시였기에 영주, 주교 등 봉건적 잔재도 없어 위그노 비율이 매우 높아졌다. 이에 프랑스 중앙정부(빌루아 왕조)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552년, 두 명의 '이단'이 시내 광장에서 화형당한 것이 시초였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원인 중 하나는 상인들에 대한 프랑스 발루아 왕실의 무리한 과세로도 볼 수 있다. 탄압이 심해지자 1555년에서 1567년까지 위그노들은 현재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 쪽에 국가를 세워 종교적 자유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포르투갈에게 추방되며 실패하였다. 1560년에 도시에서는 프랑스의 첫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났는데, 동시에 [[노르망디]]의 [[루앙]]에서도 일어났다. 1562년, --돌을 맞아 빡친-- 기즈 공이 바시에서 63명의 비무장한 위그노를 죽이자 라 로셸에서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수도사 13명이 살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